<네 인생의 이야기>
- 미래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법
테드 창의 SF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총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하나인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이 책의 메인 요리 같은 존재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기도 하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의 언어를 연구하던 주인공이 얻게 되는 능력과 깨달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언어와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들이 훌륭하게 버무려지며 테드 창만의 독특한 맛을 낸다. 다른 7개의 단편도 반짝이는 상상력으로 가득하니 한 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크게 세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키워드는 하나의 명제를 통해 연결된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미래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지금부터 테드 창이 이 소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아보자.
1. 언어와 사고의 관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고 말했다. 여기 세상을 사고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결국 언어의 지평만큼 사고가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사실 이를 보여주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서구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여성형, 남성형 명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나 (같은 단어라도 문화권에 따라 부드러움이나 또는 강인함을 떠올린다), 숫자를 일컫는 단어가 숫자감각에 연관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생각도 잘 돌이켜보면 결국 언어의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와 사고 사이의 관계를 '미래를 기억하는 능력'으로 엮어낸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다가 몇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의 언어는 선형적이기보다는 원형적이며, 인과에 얽매이지 않고 정해진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 영화 <컨택트>는 원형으로 그려지는 헵타포드의 글자를 통해 이를 더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원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다만 그 자체로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헵타포드가 가진 사고에도 반영되어 결국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주인공 역시 이러한 능력을 얻어 미래를 기억해낸다.
사실 언어와 사고 중 무엇이 선행하느냐는 철학의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해묵은 질문과도 같다. 사고가 없다면 언어도 없을 것이고, 언어가 없다면 사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 건 둘은 상호보완적으로 서로의 경계를 넓히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학습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자 사고를 확장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언어는 반드시 구체적인 글자의 형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표현하는 모든 매개체를 말한다. 미술도, 음악도, 무용도 일종의 언어이자 사고의 현신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경험한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2. 목적론적 세계관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빛은 공기 중을 날아가다 굴절률이 다른 물을 만나면 굴절된 경로를 그린다. 이는 인과론적인 해석이다. 서로 다른 굴절률이라는 원인이 있기에 꺾인 경로라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하지만 최단 시간 원리에 따르면 빛은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굴절된다. 마치 빛 알갱이가 처음부터 굴절률과 시간을 계산해 꺾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이 원리가 헵타포드와의 소통에 진전을 가져오게 된다. 이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물리법칙이기 때문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두 상황에서 빛은 같은 경로를 그린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 앞으로 나아가던 빛이 물을 만나 꺾인다. 둘, 빛이 특정 지점을 향해 최단 시간으로 가기 위해 꺾인다. 전자를 인과론적 세계관, 후자를 목적론적 세계관으로 정의할 수 있다.
목적론적 세계관은 일종의 운명론과도 같다. 세상만사에는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이 있으며 만물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느 종교의 가르침과도 맞닿아있지만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헵타포드의 '미래를 기억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고 헵타포드는 그것에 맞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인과율을 바꾸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인간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주인공은 이러한 헵타포드의 세계를 일부 엿보았고 미래를 기억하는 법을 익힌다. 이를 통해 미래에 자신이 딸을 낳을 것이며, 그 딸이 사고로 일찍 죽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만약 인과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딸을 낳지 않거나 적어도 사고를 당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딸을 가지기로 한다.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이다.
테드 창은 섣불리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다른 두 해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과론적인 세계관에 익숙해져 있기에 목적론적 세계관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직도 뭔가가 찝찝하다면 마지막 세 번째 키워드를 살펴보자.
3. 자유의지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슈는 결국 자유의지다.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고 이를 묵묵히 따라가야 한다면 자유의지는 없는 것이 아닌가? 만약 자유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알게 된다면 주인공은 마땅히 딸을 낳지 않거나 사고를 예방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딸을 가지기로 한 주인공의 모습은 언뜻 자유의지를 포기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이는 아마 언어와 사고에 관한 논쟁 이상으로 결론이 나기 힘든 질문일 것이다. 사실 자유의지가 중요한 이유는 도덕의 의미에 있다.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덕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덕 규범의 기저에는 결국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은 자유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몽유병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의지대로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자유의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의 선택이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었는가를 따져볼 수는 있겠다. 결국 자유의지의 핵심은 자유로운 조건과 의지에 의한 선택에 있다. 주인공의 상황은 이 두 가지에 훌륭히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알고 있었고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본인의 의지로 선택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다. 우선 앞서 언급한 목적론적인 세계관이 내포한 사고방식을 따져보자.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 즉 헵타포드는 미래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 미래를 바꾸지 않는다. 이것을 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저 정해진 미래에 부합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사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정해진 미래는 말 그대로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의지가 아닐까?
이는 자유의지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선택할 수 있는 게 행위가 아닌 오로지 의지뿐이라는 것이다. 내 행위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내 마음밖에 없다. 세상이 내 의지대로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런 관점도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 죽음에 대한 관념을 바꿀 수는 있다. 헵타포드는 이런 세계관을 체화했을 뿐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결국 살아가는 방법, 말 그대로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조그마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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