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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 어디까지가 차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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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의 머피 2020. 5. 22.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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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 어디까지가 차별인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 선량함과 차별주의자가 한데 모여있는 모습. 하지만 이보다 이 책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제목은 없을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집필한 김지혜 작가가 말하는 차별은 노골적이기보다는 좀 더 미묘한 개념이다. 흔히 차별주의자라고 하면 미국의 KKK단이나 지독한 마초주의자를 떠올리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차별은 그보다는 더 교묘하게 자리잡고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짚어내는 것은 일상에서 당연하게 마주하던, 한마디로 차별인지도 모르던 그 무언가다.


그래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확실히 논쟁적이다. 단순히 주류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설정한 그 차별의 경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나름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차별의 문턱을 낮출 것을 주문한다. 이를 위해 여성, 성소수자, 난민, 유색인종, 장애인 등 소수자의 다양한 층위를 소개하면서 주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차별을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그럴 수 없는 구절도 있었다. 다만 이 책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비판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작가 자신조차도 차별주의를 내면화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만큼 주류집단의 반대급부에서 어디까지가 차별인가를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또한 이런 내용에 가해질 수 있는 반박을 예상했는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절반 정도는 이런 비판에 대한 재반박에 할애했다. 다만 그 반박조차도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이 찝찝함이 '주류'로서의 오만함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논리적인 모호함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엮어 인상 깊게 읽었던 장면을 얘기해보려고 한다. 어디까지가 차별인지를 알아가기 위해서.





1. 국민이 먼저다


2018년, 약 500명의 예멘 난민이 말레이시아-제주 직항편을 통해 제주도로 입국했다. 그저 먼 세상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난민 문제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들은 관광객용 무비자 정책을 이용해 제주에 발을 들였고, 전쟁 난민으로 인정받아 한국 사회에 입성하길 희망했다. 오랜 내전과 기아, 폭력에 지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펴졌다. 대개는 유럽이나 다른 중동 국가로 향했지만 그중 일부가 한국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당장 찬반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인도적 체류 자격을 받고 한국 사회에 흡수되었다.


교환학생 당시 같이 갔던 한 후배와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평소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에 분개했고, 이를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유독 이 문제에서만큼은 당연히 난민을 받아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인들도 살기 어려운 마당에 예멘 난민을 받아줄 여유도, 책임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소수자에게도 여러 층위와 유형이 있다고. 후배는 '소수자'인 여성이기도 하지만 '주류 집단'인 한국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많은 여성이 성범죄에 대한 우려나 무슬림에 대한 거부감 탓에 예멘인들의 귀화를 반대했다. 이들 역시도 소수자임에도 다른 소수자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주류로서 자리했다. 국민이 먼저지 중동에서 온 난민을 받아줄 여력 따위는 없다고 말하면서.


이는 소수자조차 내면화할 수 있는 선량한 차별주의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만약 차별을 반대하는 근거가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선악 개념에 따른 것이라면, 즉 소수자를 포용하는 것 자체가 옳은 것이라면, 예멘 난민은 당연히 포용해야 맞다. 하지만 결국 이해관계와 적대 의식이 도덕 감정을 앞질렀고, 국민이 먼저라는 모호한 문구가 전면에 내세워졌다. 그 국민조차도 다양한 이유로 차별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2. 페미니즘은 또 다른 차별인가?


이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졌다. 사실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서는 도덕성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왜 그리도 비판을 받고 있을까?


대표적인 이슈는 페미니즘이 보여주는 소위 이중성이다. 여성에게 유리한 것에는 침묵하고 불리한 것에만 목소리를 높인다, 내로남불이 너무 심하다, 그냥 책임없는 권리를 누리겠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대응한다. 애초에 소수자인 여성에 대한 논의와 주류집단인 남성에 대한 논의가 동일 선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소수와 주류를 같은 층위에서 대하고자 하는 형식적 보편성이 오히려 차별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리한 게임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무게추를 실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차별과 평등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균형점에 관한 문제다. 과연 어디까지가 차별이고, 어디까지가 합리적 평등인가? 페미니즘이 제시하는 청사진조차 실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많은 이상론이 그렇듯 이들은 상대 진영의 존재를 애써 지우며 단순화시킨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그저 남성의 소유물 정도로 격하시키며 이들에게 주체적 권리와 합리적 이성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진영을 성별이라는 성 정체성으로 나누고 단순화된 구도 속에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스토리를 자아낸다.


물론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남성은 여성에게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물론 맞는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을 맹목적으로 신봉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그려내는 미래조차 실은 다른 의미로서의 차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남녀의 직업 선택에 관한 주장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공대에 남성이 많고, 보건대나 교육계열에 여성이 많은 것을 지적하며 이는 내면화된 차별적 의식이 초래한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틀린 주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국가 중 하나인 스웨덴의 통계를 보면 대부분의 엔지니어는 남성이고 대부분의 간호사는 여성이다. 이는 사물에 관심이 많은 남성과, 상대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3. 그럼에도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


다만 이는 왜 한국이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가 제일 높은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스웨덴에서도 엔지니어는 간호사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다. 다만 같은 직업 내에서는 남녀의 임금 격차가 거의 없다. 이 정도는 되어야 선택의 차이로 인한 결과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문제 제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어디까지가 차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과감한 대답을 내놓는다. 차별은 선량한 사람도 저지를 수 있으며, 생각보다 그 기준이 굉장히 낮다는 것이다.


진보는 여러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중 하나가 인권의 확장이다. 최근 인간을 넘어 동물에게까지 그 권리가 넓혀지는 모습은 이런 진보의 양태를 보여준다. 한 사회의 도덕성은 약자나 소수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측정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독일이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벤츠보다는 저상버스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경제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한국 사회를 아직 선진국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분명 불편한 책이다. 모든 내용에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단 하나 있다면 그 불편함 탓이다. 진보는 오직 불편함에서 나온다. 이것도 차별인가라는 번거로운 생각만이 차별주의를 타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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