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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꼭 가야 할까?

정보 & 썰/여행

by 법칙의 머피 2020. 5. 2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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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꼭 가야 할까?


난 여행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다닌다. 하지만 엄중한 코로나 시국이 겹쳐 기존에 계획했던 여행도 다 취소하고 나서 올해는 아예 해외로 나갈 생각일랑 접은 지 오래다. 안 그래도 집돌이라 바깥바람을 좀 쐬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걸 보면 여행을 못 가도 죽지는 않나 보다. 물론 국내 여행을 몇 군데 다녀온 덕분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한 모임에서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을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분이 자기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굳이 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여행을 좀 귀찮아하는 사람은 봤어도 아예 안 가도 된다는 의견은 처음이기에 신선했다. 그러다 문득, '여행을 꼭 가야 할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사실 여행은 꽤 번거로운 취미다. 체력도, 시간도, 무엇보다 돈도 많이 소모된다. 몇몇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작가 생활도 하고 영상도 제작하지만, 대개는 소소한 기념품과 사진 정도만 남겨온다. 게다가 해외여행이라도 한번 하려고 치면 돈과 시간이 왕창 깨진다. 사실상 섬나라인 국내 사정상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한쪽에는 태평양이, 한쪽에는 거대한 중국 대륙이 자리하고 있다. 그 때문에 막상 세계지도를 펼쳐도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유럽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부러웠던게 그거다.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 프랑스를 다녀오거나, 며칠 말미를 내어 터키도 다녀올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주말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일본이나 중국 동부의 홍콩, 마카오 정도다.





대신 여행은 사실상 취미 중에서는 가장 종합적이다. 누군가는 맛집 탐방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액티비티를 찾아다닌다. 여행을 가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물론 여행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보다 더 즉각적인 방법이 있을까? 그 맛에 여행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여행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집 근처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위해 왜 굳이 비싼 돈을 들여가며 여행을 가야 할까? 게다가 여행을 가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나의 정신적 체력은 말할 것도 없다. 처음 가는 지역에 발을 디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고 피곤한지. 그래서 난 보통 숙소에 짐을 풀고 좀 쉬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생긴다. 그전까지는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아니, 끌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학을 떼는 사람도 있다. 유럽에서 소매치기를 만나거나, 인도의 혼란스러운 길거리를 걷거나, 계곡에서 바가지를 잔뜩 써본 사람은 여행이라는 경험이 주는 부정적인 측면을 한껏 느끼고 돌아온다. 돈 낭비, 시간 낭비를 했으니 다시는 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행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소셜 미디어를 통한 자랑의 구실이 되는 순간, 이에 대한 반감은 더 커진다. 사실 자랑을 하고,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야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본말이 전도되어 그 여행지의 풍경은 제대로 보지 않고 사진 스팟만 찾아다닌다면 문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지에서 내가 나오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편이다. 중요한 건 내가 바라보는 '여행지'이지, '내'가 등장하는 여행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내 생각일 뿐이다.





여행을 꼭 가야 할까 하는 질문의 이면에는 상대에게 이른바 '좋은 삶의 방향성'을 강요하는 이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비친다. 충고나 조언 정도야 누구에게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의 방향키는 그 사람 본인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행이 좋든, 싫든 자기가 선택할 문제지 다른 사람이 첨언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의 고유한 신념을 바꾸려는 시도는 가끔 의미가 있을지언정 대개는 실패로 끝난다. 중요한 것은 '좋은 신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신념이 공존할 수 있는 분위기다.


여행을 꼭 가야 할까? 사실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여행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갈 것이고, 안 가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버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져봐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여행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돌아보기 위해. 둘째, 여행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타인의 신념을 돌아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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