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자본> -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
글을 시작하기 전에 고백할게 하나 있다. 난 <21세기 자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 수준도 아니다. 마치 어려운 강의를 들을 때처럼 대부분 멍 때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건방지게 <21세기 자본>에 관한 서평을 쓰고, 감히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 같은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을 미친 듯이 읽던 군 복무 시절, 보통 2~3일에 한 권을 해치우던(?) 와중에 이 책을 읽는 데는 거의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마치 <총균쇠>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유명세에 비해 <총균쇠>는 그리 가독성이 좋은 책이 아니다. 적어도 재미 측면에서는 그렇다. 다만 서론과 결론을 읽으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중심 아이디어를 알 수 있다. 두툼한 중간 부분은 그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지리적, 역사적 논증의 과정이다.
<21세기 자본>도 이와 유사하다. 토마 피케티는 단순명료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책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경제나 역사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읽기 힘든 책이다. 하지만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왜 아무리 일해도 내 삶이 나아지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하다. 우선은 피케티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좋은 차, 좋은 집, 풍요로운 생활, 호화로운 해외여행. 이 모든 재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서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돈을 원하지만 이를 벌어들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바로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이다.
근로소득은 한마디로 일해서 버는 돈이다. 회사에 나가서 키보드를 두들기든, 식당에 나가 설거지를 하든, 사과를 따며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든 자신의 노동력을 재화로 교환하는 과정이다. 자본소득은 돈이 돈을 버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부동산, 주식, 펀드, 선물 등 별도의 노동력을 들이지 않아도 자본이 자본을 벌어들인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다. 역사상 근로소득은 한 번도 자본소득을 상회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계속 가난한 노동자로 남고 자본을 소유한 부자들은 그 자본을 이용해 더 큰 부를 벌어들인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고착화한다. 한마디로 일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지 못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익숙한 개념이다. 애초에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을 가진 자가 유리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자본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대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얼마간의 재화를 얻어 삶을 이어간다.
칼 마르크스는 이런 현실 속에서 모순을 찾아내었다. 힘들게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는 노동자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을 받아 가는데, 생산수단 또는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는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다시 노동자의 손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키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야 한다. 그렇게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마르크스의 통찰은 대단했다. 역사적, 경제적 맥락을 통해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점을 짚어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공산주의의 거대한 실험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혁명을 통해 세워진 소련 연방은 옛 차르나 자본가보다 더 악독하게 인민을 착취했다. 결국 그 내부적인 모순점을 견디지 못하고 소련 연방은 붕괴한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거의 유일무이한 경제적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비록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어느정도 개선됐을지언정 자본주의의 모순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1세기 자본>도 그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여전히 자본가는 막대한 부를 누리고, 노동자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자본가가 그렇게 부를 누리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경쟁의 결과 부를 쟁취했을 뿐인데 이걸 문제라고 할 수 있겠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하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가 얻은 성과가 오롯이 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차라리 순진한 발상이다. 특히 자본소득의 경우 그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과 관계없이 부모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개천에서 난 몇몇 용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진흙 속에서 뒹굴 뿐이다. <21세기 자본>은 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소득에 고율의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그래야 불평등을 줄이고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누군가는 피케티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이 자본에 접근하기 쉬워진 시대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고, 자본시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이를 통해 부자가 될 기회가 많이 생겼다. 한마디로 일을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 빌 게이츠나 제프 베조스, 마윈 같은 최고의 부자들을 보라. 이들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부자들이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모두가 이들처럼 자수성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는 분명 대를 이어 축적되어온 부에 편승하여 손쉽게 부자가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근로자는 부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살다 가리라는 것을.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관한 한 이를 이념적 논쟁이 아닌 현실적 의제로 끌고 올 필요가 있다. 한국은 반공 정서가 유독 강해 특히 이 점을 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자나 대기업은 악의 축도 아니고 반대로 절대 선도 아니다. 노동자나 노조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현실 속에서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일 따름이다. 누군가를 이념적인 순수성에 따라 맹목적으로 판단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보다는 현실주의자가 백배 낫다.
이익 추구 관점에서 현실을 보아도 좋다. 기왕이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면 <21세기 자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그렇게 다 같이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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