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 행복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처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을 때 조지 오웰의 <1984>, 영화 <이퀄리브리엄>이 떠올랐다. 독재 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통치되는 사회, 엄격한 계급 체계와 자유의 박탈 등 비슷한 코드가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4> 특유의 기분 나쁜 서늘함이 있진 않았다. <멋진 신세계>에는 숨 막히는 감시체계도, 국가에 의한 억압도, 혁명군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모두가 행복한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가 펼쳐질 뿐이다. 만약 두 곳 중 한 곳에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면 누구나 헉슬리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세계에서는 빅 브라더로 대변되는 억압, 세뇌 과정이 주를 이룬다. <이퀄리브리엄>에서는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을 통해 감정을 지워버린다. <멋진 신세계>는 '소마'라는 일종의 마약을 등장시킨다. 부작용도 없고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작중에서는 소마 한 알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헉슬리가 상상한 멋진 신세계는 이렇게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사회다. 모두가 철저하게 계급으로 나뉘어있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끔 우울한 날이면 소마를 먹고 잊으면 그만이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아니, 행복해야만 한다.
사실 이는 '행복은 삶의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도 맞닿아있다. 그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만물에는 타고난 목적이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인간의 목적은 행복이다. 만약 지금 내가 불행하다면 내 삶의 목적에 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삶의 철학이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모든 사람이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TV만 틀면 채널 수십 수백 개가 나를 반긴다. 유흥가에서는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영화관에서는 신작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백화점엔 물건이 넘치고 신제품이 매달 출시된다. 조금 지쳤다 싶으면 행복에 관한 강연, 명상법, 템플 스테이, 각종 힐링 캠페인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불행을 행복으로 채우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기세다. 이는 기본적으로 경쟁에 치여 사는 한국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리라. 학교에서,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자리에 누웠는데 나를 더 몰아세우고 싶지 않다. 물론 누군가는 지친 몸을 이끌고 헬스장이나 영어학원으로 향하지만, 종국에는 결국 나만의 소마를 찾는다.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가 제시하는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사실 너무도 가혹하다. 이 고생과 노력 끝에 조그만 행복이라도 없다면, 삶이라는 것이 그저 참고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그 무언가라면 말이다. 왜 굳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의문도 든다.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존은 세계 총통에게 말한다. 불행해질 권리를 달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행복해져도 시원찮을 판에 불행해질 권리라니. 이는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감정의 자유를 되돌려 달라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감정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만 해도 기쁨, 슬픔, 역겨움, 소심함, 분노가 등장한다. 실제로는 훨씬 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 돌아간다. 그 감정의 폭풍우를 겪어내야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멋진 신세계>처럼 소마를 통해 감정을 통제한다면 어떤가? 설령 그것이 행복한 감정이라고 해도 이는 철저히 자유에 반하는 것이다. 자연법적인 권리 이전에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갈 의미를 잃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삶의 목적이라는 측면으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에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물에는 이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태어났다. 물론 다르게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이는 망치의 목적에 반하는 행동이며 부자연스럽다. 망치는 그런 자신의 역할에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마치 소마에 취해 독재를 보아넘기는 <멋진 신세계>의 시민들처럼.
생명체가 소중한 이유는 목적이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생명체에게는 쓰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로 이를 정리했다. 공부하는 기계, 일하는 기계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수단화 또는 대상화했을 때 나온다. <멋진 신세계>에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계급제를 유지하고, 그 계급에 따른 노동을 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오로지 행복만이 삶의 목적이라고 세뇌하면서.
<멋진 신세계>의 존이 말한 불행해질 권리란 결국 목적으로서의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다. 고통을 받을 때는 고통을 받고, 불행해질 때는 불행한 그런 자유로운 인간 말이다. 또 맹목적인 행복에의 추구가 얼마나 남용되어 왔는지를 안다면 더욱 경각심을 가지야 한다. 독재 정부하에서 탄생한 3S (Sports, Screen, Sex) 산업이나, 미심쩍은 타이밍에 터져 나오는 연예인 스캔들,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는 회식 문화를 생각해보라.
일부러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불행도 삶의 일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쾌감의 결여가 삶의 의미를 박탈하지는 않는다. 괴로움이란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괴로움이 아니게 된다.' 그는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았고 결국 살아남았다. 인간은 삶의 행불행을 선택할 수 없다. 행복과 불행을 만드는 조건을 통제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만을 선택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가 앗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최후의 보루, 자유로운 마음이다. 그것을 빼앗긴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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