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생장을 떠나 걷기 시작한 지 33일,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발을 들였다. 그 기분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 일부러 걸음을 재촉해 혼자 광장에 들어갔다. 넓은 광장의 한편에는 산티아고 대성당 건물이 서 있었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광장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대성당의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놀랍도록 간단한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아, 이제 끝났구나.'
특별한 성취감이 들거나,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벅차지도 않았다. 그저 옅은 지난날의 추억만이 떠올랐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광장을 바라보았을까. 몸을 추스르고 가방을 다시 멨다.
여행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이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도착해도, 어쩌면 필자처럼 약간 허무한 결말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광장까지 걸었던 순례길은 잊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내가 가려던 곳은 대성당 광장이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으니까. 목적지가 아닌 여정이 더 특별해지는 곳,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다.
1.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의 남은 일정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는 순례길의 목적지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그 자체로서도 꽤 아름다운 도시다. 중세의 구시가지와 대성당이 잘 보존되어 있어 눈이 즐겁다.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이 만들어내는 흥겨움도 여기에 한몫한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의 순례자 미사는 참석해보길 바란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지난날을 되새기며 기념하는데 이만한 기회가 없다. 순례자를 위해 불러주는 성가와 타오르는 향로를 보고 있으면 상념에 잠기게 된다. 성 야고보의 유골까지 보고 나면 이제 도시를 찬찬히 둘러보자. 과거 순례자들은 산티아고를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온갖 고행과 역경을 이겨냈을 텐데.
물론 알고 있다. 모두의 관심은 완주 인증서에 쏠려 있다는 것을. 자, 이제 가방 한켠에 모셔둔 순례자 여권을 꺼내 당당하게 사무소로 가보자.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하게 움직였다면 점심쯤 사무소에 도착했을텐데,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을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하루 쉬었다가 다음날 일찍 가는 걸 추천한다. 몸도 지쳐있는데 줄까지 서라고 하면 힘드니까. 사무소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순례자 여권을 제출하면 100km 이상 순례길을 걸었던 순례자에게 인증서를 발급해준다. 추가 요금을 내면 인증서를 보관할 수 있는 원통도 준다. 나름 기념품도 되고, 인증서도 안전하게 들고 올 수 있다. 이제 순례길에서의 일정은 끝난 셈이다. 나 자신, 수고 많았다.
2. 끝나버린 순례길이 아쉽다면
물론 누군가는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대성당 광장을 뒤로하고 다시 순례길을 떠난다.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피니스테레(Finisterre)다. 대서양 바다에 맞닿은 곳으로 옛 순례자들이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곳이다. 이곳에 가면 별도의 완주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대서양 바다까지 걸어가고 싶다.
순례자 중에는 아예 방향을 틀어서 거꾸로 되짚어가는 사람도 있다. 마치 연어처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순례길을 반대로 가는 순례객이 이런 사람들이다. 걷는 동안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는지라 더 고생스럽다. 하지만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이 참 멋있다.
필자는 여행을 선택했다. 귀국 전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둘러보기로 했다. 간만에 등산화를 벗고 편한 신발로 갈아 신었다. 스틱이랑 고글도 배낭 속에 고이 모셨다.
3. 이제는 순례자가 아니라 여행자로
이제 배낭 속에 잠들어있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 가이드북을 꺼내 들었다. 저 밑에 처박혀 있어서인지 좀 구겨지긴 했지만, 간만에 여행자로 돌아가니 기분이 묘했다. 도리어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설렜다.
그 뒤로 약 2주간 [포르투(Porto) ▶ 파티마(Fatima) ▶ 리스본(Lisbon) ▶ 세비야(Seville) ▶ 바르셀로나(Barcelona)]를 여행했다. 도시마다 워낙 매력 포인트가 달라서 어디가 낫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개인적으로 세비야에서는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셀로나도 좋은 도시지만 내리자마자 소매치기를 당한 터라 이미지가 좋지 않다. 각 도시의 자세한 여행기는 추후에 또 자세히 다룰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 보면 느끼게 된다. 자동차가 얼마나 빠른 교통수단인지. 1~2주를 꼬박 걸어야 하는 길을 고작 몇 시간이면 주파한다. 비행기는 말할 것도 없다. 발 아프게 비포장도로를 걷거나, 아무 데나 주저앉아 빵을 먹을 일도 없다. 숙소도 편하고 안락하다. 이렇게 순례길의 모습은 끝나고 나서 시간이 지나야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까이 있는 것은 멀리 가야 보이는 법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실 쉽사리 떠나기 힘든 곳이다. 꼭 완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끝나고 나서 든 생각은, 순례길이 따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꼭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도착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꼭 미칠듯한 고행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난 그저 걷고 싶었을 뿐이고, 이 길이 걷기에 너무나도 좋았을 뿐이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그 길을 걷고 싶다.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볼 만하고, 그러고도 몇 번을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니까.
마지막 4편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할 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살펴보자. 구체적인 준비물이나 이동경로, 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른 소스 같은 것들.
<4편에서 계속>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