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좌파 정부를 뽑아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정보 & 썰/경영&시사

by 법칙의 머피 2020. 10. 16. 12:00

본문


좌파 정부를 뽑아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래로, 아니 어쩌면 이 이전부터 이런 말이 있다. 좌파 정부를 뽑으면 경제가 망한다. 한국 한정 '좌파'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어감과 함께 이 말은 한쪽 진영에서는 거의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지금도 기사 댓글 창을 보면 내용과 관계없이 2030이 좌파 정부를 뽑았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람들이 많다. 통상 2030의 투표율이 가장 낮음에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긴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취업률과 경제성장률 등 여러 경제지표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의견에는 더 힘이 실린다. 그래서 그런 관련 기사에는 어김없이 2030을 조롱하는 댓글이 달린다. 너희 손으로 뽑았으니 그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결국 이 정부의 목적은 북한에 의한 공산화나 베네수엘라 같은 재정 파탄으로 가는 것이란다. 그 커뮤니티에서 '좌파' 사람들이 세운 북유럽 및 독일 같은 모델이나 아니면 보수가 가진 단점 같은 건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그걸 열심히 신봉하기 바쁘다.


이건 비단 보수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라 극단적인 근본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태도다. 진보 진영도, 특정 종교 집단도, 민족주의자들도 동일한 태도를 견지한다. 가장 왼쪽에서 열심히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괜히 극우로 전향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으로 치달아가면 그 안에서는 상식이나 통계, 감성보다는 억지 주장과 도그마, 집단극화, 인지적 부조화가 넘쳐난다. 그러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유튜브,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가 이런 경향성을 더욱 부추긴다. 의식적으로 반대 진영의 목소리를 들을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SNS가 제공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한쪽 세상에 갇히게 된다. 안 그래도 한쪽으로 쏠린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스마트폰만 켜면 자기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러니 내가 믿는 신념이 진리라고 믿고, 상대방 진영은 무조건 악마로 몰아간다. 그래서 '좌파 정부를 뽑은 너희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게 자기 자녀나 조카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또한 내가 믿는 신념으로 나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성향과도 관련이 깊다. 좌가 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우열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진영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있다. 한쪽에서는 베네수엘라를, 한쪽에서는 나치 독일을 들먹이며 저마다 본인들의 사상이 옳다고 말한다.


신념은 강력하지만 대개 그걸 구축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는다. 나는 보수야, 나는 진보야 하는 식으로 말하기만 하면 갑자기 나는 더 우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공부, 경험, 수련, 사색, 토론 등을 전부 뛰어넘어서 말이다. 보통은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기보다 몇몇 롤모델을 정하고 그냥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믿어버린다. 그게 훨씬 인지적인 에너지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음모론에 쉽게 휘말리고, 극단적인 것이 진리라고 믿고, 상대방 진영을 대상화하며, 특정 이념집단으로 고립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의견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떤 형태로든 규정짓고 비난한다. 극단적 페미니스트가 한남과 여성을 나누고, '애국 보수'가 좌파와 우파로 세상을 나누듯이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전략에 매우 능한 사람이다. 대통령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당선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억눌려있던 백인 빈곤층, 농부, 노동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단순히 좌우로 세상을 나눈 것이 아니라 기득권과 비기득권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익을 본 것은 결국 트럼프 자신이다.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에게는? 글쎄, 정신적인 만족감 정도겠다.


누군가가 나서서 극단적인 신념을 이야기하거든 그의 얼굴을 잘 봐두자. 몇 년 뒤 가장 이득을 보는 그 누군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을 믿은 대가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지, 그저 정신승리인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보자. 물론 만족감도 삶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 대가로 놓치는 것도 많을 수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