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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사피엔스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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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의 머피 2020. 6. 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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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사피엔스의 오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사피엔스>의 저자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신작이다. <사피엔스>가 인류의 과거를, 전작인 <호모 데우스>가 인류의 미래를 다뤘다면 이번 책은 인류의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사실 일전에 <사피엔스>를 리뷰했으니 순서로만 보면 <호모 데우스>를 다루는 게 맞을 것이다. 사실 본가에 <호모 데우스>를 두고 오는 바람에 이 책부터 다시 읽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 되었다. 21세기의 사피엔스가 마주하고 있는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결론적으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사피엔스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어느 때보다 유발 하라리 본인의 개인사가 많이 들어가 있고, 최근의 세계 정세도 제시된다. 먼 과거나 미래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에 관한 기록이다. 동성애자로서의 성 지향성을 고백하거나, 이스라엘의 시온주의를 비판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작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만큼 작금의 현실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자신도 후술했듯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확실히 논쟁적인 책이다. <사피엔스>에서 언급한, '국가, 종교, 화폐, 도덕 규범, 민족은 상상의 산물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오늘의 세상을 바라본다. 그는 이러한 허구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 사회를 유지하고, 문명을 발전시키고, 사피엔스를 지구의 패자로 군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발 하라리가 새삼 이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이유는, 다른 대안으로서의 세상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백인이 우월하다는, 남성이 우월하다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믿음이 그저 말그대로 믿음에 불과하다면 사피엔스는 또 다른 오늘을 언제든 만들어갈 수 있다.


이를 위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전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오늘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예측이 공상과학처럼 들리지 않는다면 완전히 틀린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대격변을 예고했다.





둘, 고통은 실재한다. 이 세상이 <매트릭스>일 수도, <트루먼 쇼>일 수도,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분명히 실재한다. 그 고통이 영혼에서 오든, 전기신호에서 오든 상관이 없다. 그래서 어떤 행위가 다른 존재의 고통을 증가시킨다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실재하는 것과 허구의 것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고통의 유무를 든다. 개개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한국, 삼성, 천주교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받은 것은 '이라크'나 '미국'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미군 병사들과, 죽어간 아이들, 삶의 터전이 파괴된 주민이다. 하지만 미국의 선전포고는 '이라크'를 향했고 모두가 거기에 수긍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수록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메시지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우리 민족이나 종교적 신앙, 이데올로기를 보라. 분명 주변 곳곳에서 그 증거가 있지 않은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이런 상황을 두고 '지붕이 위에서 강하게 누른 모습'이라고 표현한다. 허구의 산물은 분명 기반이 없다. 궁극에 궁극으로 파고들면 논리적이든 과학적이든 간에 근거가 없다. 하지만 그 위에 세워진 상징물, 사회 시스템, 질서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순국선열을 모신 현충원에서 사피엔스는 민족을 느끼고, 거대한 대성당에서 신을 느끼며, 하늘로 뻗은 마천루에서 자본주의를 느낀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면 이 모든 상징이 존재 자체를 증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거대한 변화에 대한 해결책으로 명상을 제시한 것이 의아했다. 보통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나, 학술회의, 세계정부 등을 예로 드는데 말이다. 이 역시도 유발 하라리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친구의 추천을 받아 명상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인생이 바뀌었다. 그 뒤로 하루에 두시간씩, 일 년에 한 달씩 명상을 위해 떠난다고 한다. AI의 역습이나, 4차 산업혁명,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으로 명상이라니. 오늘을 살아가는 사피엔스가 매일같이 달라지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사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명상을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명상법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명상보다는 산책이나 토론을 할 때 머릿속이 잘 정리된다. 사실 큰 범주에서는 이 역시 명상에 해당한다. 일상에 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두시간의 명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 당연한 것,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조금씩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그게 유발 하라리라는 사피엔스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내가 얻은 가장 큰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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