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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사보다 더 나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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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의 머피 2020. 5. 1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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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사보다 더 나쁜 것


얼마 전 '최악의 상사들이 가진 특징'이라는 글을 읽었다. 지금 내 위에 있는 상사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해 실소를 터뜨렸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1. 일이 잘되면 다 자기 공으로 돌리고, 일이 잘못되면 다 부하직원 탓으로 돌리는 책임회피형 상사


2. 자기 자랑과 꼰대질로 하루를 보내는 상사


3. 효율적인 방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밀어붙이는 상사


4. 이름과 직책을 두고 '야'라고 부르며 폭언을 일삼는 상사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그분'을 보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그분은 이 회사에 다닌 지 20년이 넘은 고인물 중 한 명이다.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걸까. 일을 다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뉴스를 보거나 근무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나가며 소일거리를 한다. 문제는 그 아랫사람이 나와 내 사수 두 명밖에 없다는 것. (작은 회사는 아니지만 팀제로 굴러가다 보니 그렇다.)


그러다 실수가 생기거나 일이 잘못되면 설령 자기가 결재를 했더라도 몇십분씩 잔소리를 한다. 그동안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덤이다. 그 잔소리 시간에 갑자기 라떼를 찾기도 하고 열정과 주인 정신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 가장 책임감 없어 보이는 상사가 그런 소리를 하니 인지 부조화를 넘어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와 내 사수의 공식 명칭은 '야'다. 친구를 부를 때도 이름을 쓰는 법인데 말이다.


최악은 아닐 수 있지만 분명 나쁜 상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그분에 대한 사연을 토로하면 내 사수가 조용히 말한다. 그나마 자기가 만난 상사 중에는 나은 편이라고. 아니, 대체 이분은 어떤 사람을 거쳐온 걸까? 놀랍고도 놀랍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대동소이하다. 모든 불행한 가정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 -


사실 좋은 상사의 유형은 거의 정해져 있다. 리더십, 포용력, 개방성, 배려와 존중 등 그려지는 이미지가 명확하다. 하지만 나쁜 상사, 더 나아가 최악의 상사는 더 다채롭다. 면전에 욕을 날리거나, 부하직원을 착취하거나,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거나, 성희롱을 하거나, 술만 취하면 개가 되거나, 서류를 흩뿌리거나, 무능력하면서 자리만 꿰차고 있다. 어쩌면 최악의 상사를 유형화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쁜 상사 욕을 하라면 정말 누구나 밤을 새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어쩌다 그 사람이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상사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상사가 나쁜 사람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저 상사 뒷담화만 해서는 모두가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물론 그분만 빼고.


잠시 생각해보자. 왜 멀쩡한 대학생이 군대만 들어가면 악독한 선임이 되는가? 선량한 시민이 왜 회사만 가면 착취형 인간이 되는가? 최고의 엘리트가 왜 금배지만 달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는가? 이는 개개인의 도덕심, 시민의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에게 책임없는 권리를 쥐여준 조직의 탓이기도 하다. 최악의 상사보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사람이 날뛰게 둔 조직이다.





나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이른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개념도 있지 않은가. 사람이 모여 집단과 조직을 이루면 그 안에는 반드시 또라이가 있으며, 또라이가 없으면 내가 또라이라는 그 슬픈 법칙 말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또라이는 보존되는가? 이는 에너지가 보존되는 이유와 동일하다. 열역학 제1 법칙에 따르면 고립계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즉 개별 에너지의 형태는 변할 수 있으나 그 합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법칙을 깨는 유일한 방법은 고립계의 경계를 부수고 외부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들이는 것이다.


나쁜 상사가 계속 나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직이 그런 사태를 방관하고 내버려 두면 조직은 하나의 작은 고립계가 된다. 그 고립계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상사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살아간다. 한마디로 또라이가 되는 것이다. 부하직원은 그 꼴을 못 보고 계속 바뀌는데 상사는 여전히 그대로다. 자정작용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하직원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세 가지다. 적응하거나, 싸우거나, 도망가는 것. 우선 현재의 부당함을 참고 버티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고인물이 되면 이 고립계가 그렇게 안락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군대에서 한창 병영 부조리 혁신의 바람이 불었을 때 선임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너희가 상병장이 되면 고생 깨나 할 거라고. 그렇다면 머리띠를 두르고 투사가 되어야 할까? 하지만 정체된 조직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승진을 감수하고서라도 얻어야 할 게 있다면 또 모를까. 그렇다고 매번 도망 다닐 수만은 없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최악의 상사도 한때는 불만 많은 신입사원이었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마 정체된 조직과, 고여버린 상사와, 그 모습을 비판 없이 수용한 부하직원과, 그렇게 흘러온 지난 세월이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최악의 상사가 아닌가 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조금씩이나마 이 고립계의 빗장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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