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지대넓얕 제로>는 아래의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자아와 세계는 하나다."
이 구절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거나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채사장의 말에 조금 귀를 기울여보자.
'모든 지식의 시작'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과 뭔가 있어 보이는 '제로'라는 수식어. 인간의 발견과 지혜를 간결한 언어로 정리해온 채사장이 이번엔 지식 of 지식을 가르쳐주겠다며 돌아왔다. 전작보다 훨씬 두꺼운 책과 함께. 두꺼운 책 애호가로서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있을까.
사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는 그 자체로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지식을 담고 있다. 다 어디선가는 보았으며, 보게 될 지식의 편린을 하나하나 모아 가지런히 정리한 책이다. 다만 그런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식의 연결과 전달이라는 본분에 충실하다. 현학의 함정에 빠져 중심을 잃지 않는다. 분명 더 할 얘기가 있어 입이 근질근질 할텐데 절제할 줄 안다.
그것도 모자라 독자들을 위해 수시로 방향을 일러준다. 마치 친절한 가이드와 같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부드럽게 손을 잡아 쭉 풍경을 보여주고는 충분한 자유시간을 허락한다. 지식을 억지로 주입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덮고 나갈 때 기억할 단 한 가지만 머릿속에 남긴다. 아주 넓고도 아주 얕은 그 무언가를.
넓고 얕은 지식이 필요한 이유
몇 년 전 말도 어려운 '통섭'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주요 골자는 결국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자는 거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문의 방향과는 정확히 대치된다. 학문이 깊지 않던 시절, 지식이라는 건 하나의 큰 덩어리로 뭉쳐져 있었다. 그래서 다 빈치 같은 이른바 르네상스 형 인간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시계를 더 과거로 돌려보자. 학문이나 기술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한 사람이 모든 걸 다하게 된다. 사냥을 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특기가 있었지만, 모두가 조금씩 모든 것을 할 줄 알았다. 함정을 파거나, 곰의 뒤통수를 갈기고, 불을 피우고, 옷을 기우고, 약초를 구분하고, 별자리를 보며 방향을 잡았다. 마을마다 지혜로운 노인이 있어 이것저것 일러주긴 했지만 그건 경험이 많아서였지 그가 특별한 학위를 따거나 자격증을 취득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로 올수록 지식은 점차 세분화되고 전문화된다. 지식이 거대하고 깊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복잡해진 사회가 지식의 파편화를 요구했다. 이젠 설령 같은 학과라고 해도 세부 전공에 따라 배우는 것이 천차만별이다. 결국 옆 동네에서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인제 와서 지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라니. 대체 무엇을 위해서? 알기 위해서다. 세상의 저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너 넓은 세상을 향해 항해해야 한다. 그럼 이 책에서 말하는 세상은 어떻게 나뉘는가?
이원론과 일원론의 세계다. <지대넓얕 제로>에 따르면 우리는 대부분 이원론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원론은 자아와 세계, 즉 너와 나를 나눈다. 학문 간의 구분도 여기에서 기인했다. 이 사상에 따르면 학문 간의 물리적 결합은 가능해도 화학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수학자와 역사학자를 한 자리에 앉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애초에 수학과 역사학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둘은 애초에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모두가 하나라는 그런 소름 돋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일원론에도 조금 흥미가 생긴다. 그런데 어떻게 저편으로 넘어갈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때 채사장이 등장해 뭔가를 내민다. '넓고 얕은 지식'이다. 모두를 아우르기에 충분히 넓고, 아집에 빠지지 않을 만큼 적당히 얕은, 그런 지식 말이다.
자아와 세계는 하나다
사실 일원론은 적어도 동양인인 우리에게는 익숙한 개념이다. 어디선가 음양 마크를 보았다면 말이다. 음과 양은 언뜻 다른 실체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원 안에서 움직이는 동일한 실체의 다른 양태일 따름이다. 음과 양은 뒤섞이며 여러 색을 빚어낸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불교에 따르면 세계는 자아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다. 즉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있을 뿐이다. 자아는 곧 세계이고, 세계는 곧 자아이다. 둘은 하나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괴로움을 부른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르고, 해탈한 자를 부처라고 한다.
심지어 최신 과학도 이 생각에 힘을 보탠다. 원자보다 작은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에 따르면 고정된 실체로서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오로지 관찰자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즉 내가 달을 보기 전까지 달은 그 자리에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미시세계에서는 그렇다. 자유로이 돌아다니던 전자는 오로지 관찰자인 내가 관찰이라는 행위를 해야 그 자리에 나타난다. 그전까지는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존재하지도, 부재하지도 않는다.
<지대넓얕 제로>는 이처럼 언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상과 근거를 독자 앞에 쏟아낸다. 이원론에 익숙하다면 더더욱 고개를 저을 것이다. 어떻게 자아와 세계, 나와 네가 하나일 수 있는가? 이 책은 일원론이 진리라고 하지 않는다. 이원론도 마찬가지다. 다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늘의 저 달은 원래 내가 보기 전에 있었다고 할 수도 있고, 내가 보고 나서야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채사장의 책 중 가장 어렵게 읽었다. 그래도 아직 가볍다. 훌훌 털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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