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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저도 파견병 후기

정보 & 썰/해군

by 법칙의 머피 2020. 3. 2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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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저도 파견병 후기


저도는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가 지나는 섬이다. 위의 사진에서 다리 사이에 있는 가운데 섬이 바로 저도다. 약 47년간 대통령 별장 및 해군 휴양지로 쓰이다가 최근 민간에 시범 개방을 하는 중이다. 완전히 개방할지, 아니면 다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찾아가기 힘든 섬이라는 건 분명하다.


해군 후반기 교육이 끝나고 군함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데 몇 명의 동기와 함께 저도라는 섬으로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섬이었다.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짐을 싸 들고 어디론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장성(흔히 말하는 스타)들의 공관을 관리하는 부대였는데, 그곳에서 하루 이틀 정도 머물다가 배를 타고 저도로 향했다.


저도는 기본적으로 해군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군함도 항상 정박하고 있고 해군 장병들도 근무한다. 항상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는 곳이다 보니 한 번씩 해군 이등병을 모아 파견을 보내곤 하는데 거기에 차출된 것이다. 덕분에 함정 생활은 한 달 더 미뤄지게 되었다.





흔들리는 군함 안에서 동기들과 통성명을 하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거가대교가 눈에 들어왔다. 위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그렇게 진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뒤이어 저도가 나타났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어떤 곳일까? 그때는 몰랐다. 저도는 아름다운 지옥이라는걸.


배에서 내려 생활관으로 걸어갔다. 작지만 아름다운 해변, 골프장, 산책로가 펼쳐졌다. 새는 지저귀고 파도 소리만 들려오는 그런, 뭐랄까. 그래, 휴양지다. 물론 세부나 보라카이 같은 휴양지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잊지 말자. 여긴 해군 부대다. 그래도 힐링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만큼 조용하고 깔끔한 곳이었다. 아, 그때 알았더라면. 그 깔끔함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 드넓은 골프장을 누가 조성하는 건지.


생활관에 도착하고 잠시 앉아 기다렸다. 먼저 이 섬에 파견 왔던 동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아, 여기 빡세겠구나. 그 지친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짐을 풀고 그날부터 섬 노예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부르던 자조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장고 : 분노의 추적자>를 보면 흑인 노예가 등장한다. 하지만 노예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목화밭에서 죽도록 목화를 따고, 누군가는 주인의 시중을 든다. 그중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스티븐은 집사를 맡고 있는데, 웬만한 백인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저도 파견병은 저마다의 역할, 내지는 담당해야 하는 장소를 배정받는다. 같은 지옥이라도 그 장소에 따라 레벨이 나뉜다. 마치 단테의 <신곡>처럼 지옥에도 엄연한 층위가 있다. 크게는 공관 관리병, 산책로병, 골프병으로 나뉘었다. 뒤로 갈수록 뭔가 싸한 기분이 든다면 정답이다.


골프병이 뭐하는 애들이냐고? 저 푸른 골프장을 골프장답게 만드는 직책이다. 골프장답다는 건 대략 이렇다. 우선 잔디는 완벽하게 깎여있어야 한다. 특히 그린 부분은 거대한 철제 롤러로 눌러줘야 한다. 여기서는 기름값 절감을 위해 사람이 직접 힘으로 돌린다. 실제로 계산해보니 파견병의 시급보다 기름값이 더 비쌌다. 벙커에는 잡초 하나 없어야 한다. 자잘한 돌멩이도, 누렇게 죽은 풀도 없어야 한다. 실제 골프장은 아마 기계를 돌리겠지만 저도에는 신이 만든 최고의 피조물, 해군 장병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난 골프병이었다. 제발. 여긴 그늘도 없다고.


일과는 대략 이렇다. 눈을 뜨자마자 골프장에 나가서 잡초를 뽑는다. 아침을 먹고 다시 골프장에 나가 풀을 긁어내고 돌을 치운다. 점심을 먹고 골프장에 나가 못다 치운 풀 무더기를 걷어내고 돌을 치운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기 전까지 골프장에 나가 뒷정리를 한다. 씻고 다시 잔다. 주말만 기다리면서. 생활관 시설은 어떻냐고? 상상에 맡긴다. 난 내 인생에서 그렇게 높고 위험한 2층 침대를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용케 떨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마냥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저도는 휴양지이기에 괜찮은 경관을 자랑한다. 대통령 별장이나 콘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앉아 쉬었다는 정자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또 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감정도 든다. 분명 땅이지만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그런 애매한 상황 탓일까. 아니, 그보다는 뭔가 세상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그런 느낌 때문인지도. 그래서 이곳이 대통령 휴양지로 오랫동안 쓰였으리라.


황당한 일도 겪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배수로를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하수도까지는 아니었고 물이 빠지는 통로 정도였다. 비에 절어있는 나뭇가지나 나뭇잎, 흙을 퍼냈다. 장갑도, 옷도, 모자도 다 젖어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간신히 다 끝내고 이제야 들어가나 싶었는데 간부 하나가 갑자기 손뼉을 친다. 배수로의 비포어 & 애프터(Before & After) 사진을 안 찍었다는 거다. 보고용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기껏 정리한 배수로에 다시 자연의 잔해물을 퍼담았다. 간부는 사진 몇 장을 찍고 유유히 사라진다. 아, 이제 다시 치워.


'허허, 이 부대는 낭만이 없구만'이라는 사단장의 한마디에 눈을 다시 연병장에 뿌려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런 게 가능한 게 군대구나 싶기도 하다. 내가 겪은 건 그나마 약과겠지만 화딱지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달간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저도 파견병으로서의 마지막 날, 하얗디하얀 해군 정복을 차려입고 배를 타기 위해 섰다. 그동안 우리를 갈궈댔던 선임들이 우리를 부른다. 아쉬운 눈으로 파견병을 쳐다보면서. 그동안 미운 정이 든 것일까. 마지막 인사라도 하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보급품을 좀 옮겨 달란다. 갑자기 분위기 보급품이 되었다. 감자푸대랑 배추를 옮기며 생각했다. 그래, 이래야 완벽한 마무리지. 다시 육지로 돌아오는 배에서 동기들끼리 다짐했다. 우리, 여기서의 기억을 절대 미화시키지 말자. 오래오래 가슴에 새기자.


이제 해군의 꽃인 함정 생활을 하러 떠나야 한다. 동기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 군함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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