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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갑판병 후반기 교육 후기

정보 & 썰/해군

by 법칙의 머피 2020. 3. 2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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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갑판병 후반기 교육 다녀온 후기


해군에 입대하면 보통 육군에서 보직이라고 부르는 직별을 부여받게 된다. 직별은 해군에서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가를 말한다. 조리병이나 운전병처럼 명칭만 들어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직별도 있고, 갑판병이나 전탐병처럼 아리까리한 경우도 있다. 아예 입대하기 전에 특정한 직별에 지원할 수도 있고, 훈련소에 들어가서 직별을 선택할 수도 있다.


훈련소를 수료하면 그 선택된 직별에 따라 거기에 맞는 후반기 교육을 받는다. 훈련소가 일반적인 군인을 길러내는 과정이라면, 후반기 교육은 그 군인을 실제로 현장에 투입하기 위해 가는 일종의 학교 같은 개념이다.


해군은 사실 어느 정도 선택의 자유가 있는 편이다. 훈련소에서 자신이 갈 함대나 군함의 종류, 직별도 선택이 가능하다. 물론 100% 그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특히 전탐병, 갑판병, 병기병 등은 훈련소에서 선택해야 갈 수 있는 직별에 해당한다.



갑판병은 뭐 하는 애들인가?


그중에서도 갑판병은 해군의 꽃이라고 불린다. 아,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 하나. 군대에서 꽃이라고 불리는 건 제일 힘들다는 뜻이다. 훈련소의 꽃은 야교대, 야교대의 꽃은 화생방이라고 하면 대충 느낌이 오지 않는가? 갑판병은 배에서도 가장 빡센(?) 직별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된다. 다만 수가 많아서 그 힘듦이 분산될 뿐이다. 여기에 병기병, 조리병이 노답 삼대장으로 자주 언급된다.


그럼 갑판병은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할까? 갑판 청소, 페인트칠, 기름칠, 밧줄 정리, 입출항, 보급품 나르기 등 주로 힘이 들어가는 일을 많이 한다. 뭔가 대항해시대 선원들이 할 법한 일이라고? 딱 그거다. 심지어 항해를 나가면 견시 당직이라고 해서 저 푸른 바다를 멍하니 감시해야 한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그냥 배의 겉면, 갑판이든 외벽이든 닻이든 뭐든 보이는 대로 갑판병의 몫이라고. 갑판 페인트칠이 좀 벗겨졌다고? 갑판병이 출동할 시간이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어른 팔뚝만한 밧줄이 어지럽게 널려있다고? 갑판병을 불러보자.





갑판병을 선택하는 이유


그럼 이렇게 힘든 갑판병을 굳이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고백하자면 난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해군에 지원할 때 토익 점수를 넣는 칸이 있었다. 카추사에 떨어진 뒤로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성적표를 올렸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런데 덜컥 '어학 갑판'이라는 아리송한 직별로 배정받았다. 훈련소에서 나름 머리를 굴려 어디를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군은 이런 식으로 어학병 내지는 통역병을 모집한다. 결국 하는 일은 갑판병과 동일하지만, 혹시 영어를 쓸 상황이 있으면 가끔씩 부르는 식이다. 그리고 꼭 첫날 영어로 자기소개시킨다. 물론 그중에 진짜 잘하는 병은 모집해간다.


하지만 갑판병도 분명히 장점이 있다. 우선 앞에서 말했듯이 인원이 많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가봐야 안다. 하다못해 휴가를 나가도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하다. 만약 선임이랑 나랑 둘이서 일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선임은 아무리 좋아도 선임이다.


또 육상 근무 시 이른바 편한 곳으로 빠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해군의 경우 일정 기간 함정 생활을 하고 육상 근무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갑판병은 상대적으로 좋은 부대로 배치받는 편이다. 육상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함정 생활보다는 편하다. 적어도 배는 안 타니까. 사람이 괜히 육지 동물인 게 아니다. 그래서 아예 전략적으로 갑판병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돌 나르고 잔디 깎는 곳에 배치되어 피-땀-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갑판병 후반기 교육은 어떨까? (feat. 어학병 교육)


훈련소를 수료한 날, 이등병 마크를 달고 우리는 다들 의기양양해졌다. 마치 군 생활이 끝난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반기 교육에 가야 한다. 정든 동기들과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다. (다시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서로의 수첩에 연락처를 적고 각자 갈 길을 떠났다.


짐을 짊어지고 일렬로 줄을 맞춰 걸어갔다. 버스를 타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후반기 교육장이 훈련소 바로 옆에 있다. 그렇게 훈련소 담벼락도 벗어나지 못한 채 갑판병 교육이 시작되었다. 뭔가 허무하다.


교재에는 청소도구 종류, 밧줄 매듭법, 페인트 종류 같은 게 나와 있다. 내가 군인인 건지 환경미화원인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어쨌든 교육은 약 3주간 진행된다. 얼차려도 웬만해선 받지 않고, 굉장히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뭐,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눈을 부라리는 교관도, 선임도 없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소랄까? 동기들이랑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자.


이론보다는 실전이 중요한 법. 각종 매듭법을 직접 익히거나, 함정 실습을 나가기도 한다. 당시 실습을 나갔던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을 한참 뒤에 교환학생 때 만나기도 했다. 정말 세상 좁다. 착하게 살아야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3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나면 이제 각자의 부대로 배치받을 시간이다. 보통 이때쯤 각자가 탈 배를 말해주는데, 희비가 많이 엇갈린다. 표정만 봐도 얘가 어느 함대에 어느 배를 타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백령도나 연평도로 간 동기도 있었는데 순간 모두가 숙연해졌다. 참고로 백령도는 서해에 있는데 휴전선보다도 북쪽에 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라며 간부가 어깨를 두드렸는데, 보통 그런 말은 사람 죽어나가는 곳에 갈 때 많이 건넨다.


나도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따로 몇 명을 부른다. 갑판병이긴 하지만 어학 갑판의 경우 어학병 교육을 일주일 더 받는단다. 감사한 일이다. 어학병 교육 자체는 재미없는 영어학원 느낌이다. 계급이나 군함 종류, 각종 군대 용어를 영어로 익힌다. 생활 자체는 편해서 더 늘어질 수 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주일 뒤, 이젠 정말 심판의 날이 밝아왔다. 짐을 싸들고 서있는데 또 따로 몇명을 부른다. 내가 뭐 잘못했나? 아, 혹시 다른 배로 가나?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데 간부가 말한다. 너희들, 섬으로 파견가게 됐다. 네? 섬이요? 저희 배는 언제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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