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해군 훈련소 다녀온 후기

정보 & 썰/해군

by 법칙의 머피 2020. 3. 19. 22:06

본문



해군 훈련소 다녀온 후기


해군 훈련소에 다녀온 지 이제 거의 6년이 되어간다. 이제서야 후기를 쓴다는 게 웃기긴 하다. 추억(?)도 되살리고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글을 끄적이게 됐다. 나는 이렇게 힘들었다며 하소연하려는 게 아니니 내가 더 빡셌다, 안 빡셌다 하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시길. 해군 입대를 앞두고 있거나, 옛 기억을 더듬고 싶거나, 아니면 그냥 심심한 사람이 읽으면 좋다.


해군 훈련소의 정식 명칭은 해군 기초군사교육단, 줄여서 '기군단'이다. 하지만 너무 길기도 하고, 훈련소라는 훌륭한 단어가 있으니 그냥 훈련소로 통일하기로 하자. 약 5주간 훈련을 받았는데 지금은 6주 정도로 늘었다고 한다. 육해공 훈련소 중 가장 힘들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 3군 훈련소를 다 겪어본 사람은 없기에 그저 참고만 하도록 하자. 참고로 훈련소는 경남 진해에 있다.





훈련소 첫날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봄날의 어느 날, 진해 훈련소 앞에 도착했다. 여자친구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눈물을 훔치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복잡미묘한 생각을 품고서 조용히 핸드폰을 정지했다. 한쪽에 앉아 있으려니 저 멀리서 방송이 울려 퍼진다. 출신 지역별로 줄을 서란다. 일렬로 줄을 맞춰 섰다. 앞사람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땐 몰랐다. 이놈의 뒤통수만 지겹게 보면서 지낼 거라는걸. 주변의 아이들도 엉거주춤 섰다. 아직 대학생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있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술을 마셨을 그 아이들이 말이다.


간단한 인원 점검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작별의 순간이다. 같이 왔던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라. 네.


이상했다. 걸어갈수록 공기가 변했다. 바깥의 시끌벅적한 세계와 단절되는 느낌이 들었다. 말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착잡한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하던 교관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차라리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국방부의 시계는 이제 가고 있으니까.


가장 먼저 한 일은 민간인으로서의 탈을 벗는 것이다. 대강당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우리의 사복은 고이 접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보내졌다. 소대를 배치받고 입소식을 했다. 아직 민간인 티가 역력한지라 다들 어색하게 경례를 했다. 그리고 교관은 그런 병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매의 눈으로 잘못하고 있는 한 명을 집어내서 얼차려를 줬다. 그러면 일말의 공포심이 아이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조금 있으면 그 마음마저 무뎌질 테지만 그래도 공포는 효과적이었다.


어찌어찌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떠도 다시 이곳일 거라는 생각, 여긴 왜 이리 침대가 불편할까 하는 생각, 그리고 아, 졸리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다음날 일어나 여전히 훈련소라는 걸 알고서는 섬찟했다. 그리고 제대하려면 700일이 넘게 남았다는 생각에 한 번 더 놀랐다.




해군 훈련소의 흔한 일상


그렇다. 해군은 다르다. 다른 훈련소를 가본 적은 없지만 다양한 술자리 무용담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감히 말할 수 있다.


해군 훈련소는 수학을 사랑한다. 대표적인 게 직각에 대한 집착이다. 피타고라스도 아니고 뭐든지 직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 화장실을 갈 때도 대각선으로 쪼르르 갔다가는 대번에 얼차려를 받는다.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모퉁이를 돌아서 가야 한다. 팔도 90도로 휘저으면서 걷는다. 하다못해 이불 접어놓은 것도 직각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각도는 45도다. 경례하는 손의 각도도 45도, 차렷 자세에서 벌리는 발의 각도도 45도, 걸어갈 때 뒤로 뻗는 팔의 각도도 45도다.


기하학을 끝냈다면 이제 대수학을 할 차례다. 별건 아니다. 그냥 얼차려 마지막 구호에 숫자만 '안' 붙이면 된다. 그런데 수백 명의 지친 사람 중 꼭 한두 명은 마지막 숫자를 외친다. (그래서 난 입만 벙긋거리고 숫자 자체를 외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얼차려의 개수는 등차수열로 늘어난다. 얼차려는 그냥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고, 나 역시도 소리를 지르고, 모두가 소리를 지르는 운동. 덕분에 완전 저질이었던 체력이 조금 덜 저질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도 신기한 게 하나 있다. 바로 교관의 발성법이다. 나 같은 유리 성대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는 하루도 안 되어 목이 다 쉬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교관은 날카로우면서 중후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크게 발성을 할 수 있다. 마이크가 없어도 생활관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렇다고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군가를 불러주는데 너목보 음치 편을 보는 줄 알았다. 결국 음대 출신 병이 차출되어 다 같이 즐거운 군가 타임을 보냈다.


해군에는 과실과 양호라는 점수 제도가 있다. 말 그대로 잘못하면 과실, 잘하면 양호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과실 점수를 받은 훈련병은 일과 후에 따로 얼차려 겸 훈련을 받았다. 난 그 모든 훈련에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처음에는 좀 괴로웠지만, 나중에는 운동이라 생각하고 즐기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안 되는 격언을 여기서 실천하게 될 줄이야. 즐길 수 있으면 안 피하겠지.


얼차려의 매력은 순간적인 강도보다는 빈도에 있다. 계속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 이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나중에는 몸이 힘든 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다. 육체는 그냥 정신에 질질 끌려다니는 형국이고, 그 정신도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얼차려를 받다 보면 누군가는 실수하기 마련이고 그 실수 덕에 얼차려는 기하급수적으로 길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들의 체력도 증진되니 얼차려의 강도도 점점 세진다. 그게 시간이 남아서 하는 거라는걸 나중에야 알았다. 아무도 실수를 안 하면 교관이 뒤에서 그놈의 마지막 숫자를 외쳤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그러려니 하자.




물놀이 시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해군의 꽃은 전투 수영훈련이 아닌가 싶다. 수영이면 수영이지 무슨 전투라는 섬뜩한 단어가 붙나 싶을 것이다. 조금 해보면 알게 된다. 전투를 대비한 수영이 아니라 전투 같은 수영의 준말이라는 것을.


한창 연병장에서 구르고 구르다가 수영장에 들어오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물론 몸 식지 말라고 수영장 바로 앞에서도 굴린다. 수영장 안에서도 열심히 굴려준다) 이제 해군이라는게 조금 실감 나기도 하고, 수영을 좋아한다면 들뜨기도 할 것이다. 앗, 나는 수영을 못하는데 어떡하냐고? 걱정 마시라. 옆에 있는 친구들 태반이 물에 뜰 줄도 모른다. 다들 핵잠수함처럼 가라앉는다. 그리고 SSU(해난구조전대) 출신 교관님들이 어떻게든 물에 둥둥 뜨게 만들어준다. 세상엔 물보다 무서운 게 많다.


훈련이 시작되면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인원을 나누게 된다. 잘하는 사람들은 교관을 보조해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장병들을 가르친다. 애매한 사람들은 여타 생존 훈련을 받는다. 그 애매한 그룹에서 가장 큰 곡소리가 난다. 보통 배가 침몰했을 때를 가정해 육지까지 같이 이동하는 훈련을 하는데 위에 있는 사진 같은 모습이다. 나중에는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일명 이함 훈련도 한다. 5m 정도의 높이인데 밑에서는 할만해 보이지만 막상 올라가면 도로 내려가고 싶어진다. 그래도 막상 뛰고 나면 재밌다.



야전 교육대 가는 길


해군에는 야전 교육대, 일명 '야교대'라고 불리는 훈련소가 따로 있다. 통상적으로 훈련을 받던 기군단에서 잠깐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간다. 훈련의 강도도 더 세지고, 밥도 더 맛없어지고 (그게 가능하다고?), 자는 곳도 더 부실해진다. 훈련소 안의 훈련소랄까? 약 1주일간 이곳에서 머물며 훈련을 받게 되는데 화생방이나 사격, 유격, 목봉 훈련 같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가득하다. 예비 장병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알짜배기 같은 훈련만 모아놓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특히 화생방 훈련이 제일 걱정될 것이다. 누구나 가장 힘든 순간으로 꼽으니까. 나 역시도 그랬다. 라식을 한 지 얼마 안되면 빼준다, 가스를 마셔도 멀쩡한 울버린급 유전자가 있다 등 루머가 많았지만 나는 전혀 해당하지 않았다. 거기 있던 조교가 '나도 라식했어. 들어가'라는 말을 하자 절망하던 아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훈련은 방독면을 착용하고 들어가서 한쪽에 달린 정화통을 빼고 다시 끼는 식으로 진행된다. 사실 시간 자체는 그렇게 길진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세월을 체험하게 된다. 방독면을 잘못 착용한건지 자체가 불량인 건지 들어가자마자 목이 따가웠다.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근데 이미 늦었다.





들어가면 군가를 부르고 얼차려를 주고 생난리를 치다가 정화통을 분리한다. '숨을 참으면 되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은 버리자. 그 정도면 거의 프리다이빙 선수를 해야 맞다. 또 숨을 참다 참다 한 번에 들이쉬면 생지옥이 시작된다. 정화통 구멍을 휴지로 막는 꼼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숨이 안 쉬어진다. 그냥 정석대로 하는게 그나마 덜 지옥 같다.


우선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입에서는 침이 흐른다. 목은 따갑다 못해 피가 날 것 같고 피부는 타들어간다. 무엇보다 숨이 제대로 안쉬어지니 공포감이 상당하다. 고춧가루를 푼 물에서 익사하는 기분이랄까? 건강에는 해가 없다는 말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다. 뭐, 그렇다. 맨 앞에서 죽을 맛으로 앉아있다가 뒤를 돌아봤다. 웬 좀비 아포칼립스가 펼쳐진다. 그 광경은 상상에 맡기겠다. 진짜 위에서 나온 살려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화생방을 끝내고 나면 참 후련하다. 100kg짜리 목봉 들고 열심히 체조도 하고, 유격 훈련에서 집 라인도 신나게 타다 보면 이제 다시 훈련소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제 훈련소가 그리울 판이다. 소름이 돋는다 정말. 땅바닥 밑에는 지하가, 지하 밑에는 지옥이 있다더니. 훈련소까지는 행군하면서 가는데 육군에 비하면 그냥 산책이라고 보면 된다. 어느새 바깥에는 벚꽃이 가득했다. 감성 돋는 한 친구는 벚꽃을 꺾어 수첩 사이에 끼워두었다. 여자친구한테 보낼 거란다. 너희, 잘 만나고 있니?



이등병 됐다고 신나지 말아야 하는데...


훈련소 막바지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약간 풀린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다시 안 와도 된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이제 훈련병이 아닌 이등병이 되어 설레기도 한다. 그 작대기 하나가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하지만 알고 있다. 군대 생활은 이제야 시작되었다는걸.


악마 같던 교관도 조금 덜 악마 같아지고, 그들 역시 힘들게 살아가는 한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교관을 하게 되면 진급에 있어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엄청나게 힘들다. 하루종일 수백 명의 병사들을 윽박지르고 굴려야 한다. 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계속 근무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행정적인 업무도 봐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도 교관 뒷담화가 제일 재밌는 건 어쩔 수 없다.





수료식은 깔끔하게 정복을 차려입고 진행된다. 가족과 친구들도 다시 만날 수 있다. 훈련소 정문으로 들어선 지 한 달 만에 다시 보는 건데 거의 몇 년 만에 상봉하는 것 마냥 눈물이 난다. 거의 제대에 준하는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수료식이 끝나면 반나절 정도 외출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제 각자의 병과 내지는 특기에 따라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된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자.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이야기를 담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혹시 입대를 앞두고 있다면 너무 걱정하지 말자. 혼자서 하면 못견디겠지만 다 같이 하면 그나마 할만하다. 잘 다녀오시길! 물론 위로가 1도 안된다는거 알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