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성 라퓨타>,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이 영화는 <걸리버 여행기>의 4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동명의 국가를 소재로 차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예 작중에 그 소설을 등장시키며 영감을 얻었음을 노골적으로 밝히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작품인 <미래소년 코난>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신비한 소녀와 그녀를 구하는 소년, 로봇이나 비행기의 디자인까지, <천공의 성 라퓨타>는 미야자키의 초기 작품 세계를 대변한다. 가까운 미래,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포화 속에 있고 과학 기술은 독재자의 손아귀에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건 세태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 그리고 자연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원령공주>도 넓은 의미에서 이런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지브리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처음 내놓았을 때, 지브리가 한 단계 더 앞으로 성장했음을 직감했다. 남녀 주인공은 아이들이 아닌 때 묻은 어른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우정에 가까웠던 둘 사이의 사랑도 이제 더 원숙해졌다.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던 남자 주인공은 이제 울면서 여자 주인공의 품에 안긴다. 괴로워할지언정 전쟁에 참여하여 괴물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여전히 지브리의 작품이다. 미야자키가 일관되게 강조해온 반전(反戰)이나 자연보호, 과학기술에 대한 경계 등 여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성의 모습은 <천공의 성 라퓨타>의 결말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두 성은 고통이 가득한 지상을 떠나 이상적인 천상을 향해 날아간다. 다만 아예 인간 세상과 단절되었던 라퓨타와는 달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주인공을 모두 태운다. 심지어 악당이었던 황야의 마녀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마치 순수함만을 추구하던 사춘기 아이가 점점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는 격이랄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선악 구도도 명확하지 않다. 초기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비판해야 할 대상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의 무스카 소령이나 장군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악역은 누구인가? 황야의 마녀? 하울의 스승? 하울이 싸우던 적국? 아니면 폭탄을 떨어트린 하울 본인? 누구라고 쉽사리 말하기 어렵다.
여담이지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릴 때는 하울이 그렇게 멋져 보였는데 크고 나서 보니 그냥 어린애였다고. 그만큼 훌쩍 자라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더는 순수함을 믿지 않게 되고, 세상을 제대로 알아버렸기에. 하지만 감히 말하련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성장해버린 지브리를 훌륭하게 담아낸 작품이었다고. 하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의 순수함도 때로는 그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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