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즈니 공주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대변하는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공주다. 마치 결혼식의 주인공이 신부인 것처럼. 디즈니가 주로 동화를 차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중세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공주와 왕자의 사랑을 중심 소재로 삼는다.
디즈니 초기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공주의 모습은 대개 수동적이었다. 분명 주인공이지만 왕자같은 강력한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자고 있다가 그냥 깨어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가장 대표적이다. (난 아직도 이 공주의 이름조차 모른다.)
이때 색다른 관점에서 공주의 역할을 뒤집은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드림웍스의 <슈렉>이다. 슈렉 시리즈는 애초에 디즈니를 겨냥해서 제작된 영화였다. 자연스레 동화적 클리셰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식으로 플롯이 진행된다. 백마탄 왕자 대신 늪에 사는 슈렉이 공주를 구하고(?), 피오나 공주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디즈니 영화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슈렉 시리즈의 성공을 의식해서일까, 아니면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해서일까? 디즈니 공주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라져버린 디즈니 공주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자.
1. 백마탄 왕자는 없다.
디즈니 영화에서 백마는 단순한 이동수단이나 동물이 아닌 왕자, 혹은 왕자의 역할에 대한 상징이다. 백마탄 왕자가 멋있게 나타나 공주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백마가 필요하다. 힘차게 숲이나 들판을 내달리는 네 다리, 태양처럼 빛나는 갈기, 공주를 위해 돌진하는 모습까지. 백마는 훌륭하게 왕자라는 캐릭터의 속성을 대변해왔다.
그래서 디즈니는 왕자에게서 백마를 빼앗는다. 이제 디즈니 영화에서는 백마탄 왕자를 찾기 어렵다. 영화 <라푼젤>에서 백마를 타고 달리는 것은 왕자가 아니라 도둑인 플린이다. <겨울왕국2>에서는 주인공 엘사가 말을 타고 당당하게 나타난다. 왕자는 이제 <겨울왕국>에서처럼 악당이거나, 디즈니 실사영화 <알라딘>처럼 여주인공을 위해 자리를 내어준다.
왕자의 역할이 축소된 자리를 공주가 메우기 시작했다. 영화 <라푼젤>에서 주인공 라푼젤은 왕자가 공주를 구한다는 원작의 설정을 뒤집고, 자신의 힘으로 탑을 내려온다. 여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긴 머리카락도 후반부에 잘라버린다.
이제 디즈니 공주는 왕자를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성안에 갇혀 바깥 세상을 보고싶다고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으로 상황을 극복하고 오히려 남성을 당당하게 리드하며 살아간다.
2. 공주를 넘어 여왕으로
작년에 개봉한 디즈니 실사영화 <알라딘>에서 자스민 공주는 술탄으로 즉위한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겨울왕국>은 애초에 주인공 엘사를 여왕으로 설정한다. 사실 공주는 권력의 최상층에 있으되,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존재다. 누구나 떠받드는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한 다른 '공주'들은 왕자와의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한다. 신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대에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신데렐라>의 엘라나 <미녀와 야수>의 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공주가 아닌 평민 출신이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요정 대모(Fairy Godmother)같은 신적인 존재가 이들을 돕는다. 이제 해피엔딩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비록 신분상승은 이루어냈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한만큼 주체성은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이제 디즈니 공주들은 아예 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신보다 신분상 낮은 남성과 결혼한다. 이제 혼인은 더 이상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한 하나의 선택지가 되었다. 누구 말마따나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다. 다만 아직 인간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시기상조다. 기억하자. 엘사가 여왕이 된 것도, 자스민이 술탄이 된 것도 어디까지나 왕족이라는 핏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 성 밖으로 나온 디즈니 공주
달라진 디즈니 공주의 모습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최근 주류로 떠오른 PC나 페미니즘에 편승하는 상업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껏 수동적 여성상을 내보이던 디즈니의 다른 행보에 박수를 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둘다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본다.
다만 애니메이션에서만큼은 어느쪽이든 좀 더 자연스러웠으면 하는, 그런 소박한 바람이 있다. 실사 영화와는 달리 어린 관객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컨텐츠계의 최강자로 떠오른 디즈니가 아니던가. '강한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처럼 더 깊게 생각하는 디즈니가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더 달라질 디즈니 공주의 모습을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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