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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가 어른들을 사로잡은 이유

컨텐츠/만화&애니메이션

by 법칙의 머피 2019. 12. 2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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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픽사 스튜디오의 팬이다. <월-E>는 여전히 장편 애니메이션 중 최애 작품으로 남아있다. 픽사는 디즈니와 합병한 뒤로도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애니메이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디즈니는 '아이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지만, 픽사는 '어른들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 물론 디즈니 역시 <주토피아>나 <겨울왕국 2>에 자신만의 메시지를 담으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깊이에서는 여전히 픽사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픽사의 작품이 성인 관객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1. 노스탤지어


<겨울왕국>은 디즈니의 메가 히트작 중 하나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은 그야말로 흥분상태에 빠졌다. 엘사 머리를 하고, <Let it go>를 부르고 다닌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간 부모들은? 별 감흥이 없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엘사의 이야기는 부모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밌게는 볼 수는 있지만 감동받지는 않는다.





반면 픽사의 작품들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픽사의 첫 작품인 <토이 스토리>를 생각해보자. 지금의 어른 세대에게 장난감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금이야 영상 컨텐츠도 다양하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을 위시한 각종 디바이스가 있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장난감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 아예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업>이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인사이드 아웃>이 성인 관객에게 울림을 준 것도 이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픽사의 작품에서는 의외로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그렇게 묘사되는 캐릭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니모를 찾아서>에서의 말린이나 <인크레더블>처럼 부모거나, <인사이드 아웃>이나 <토이 스토리>처럼 아이를 지켜보는 역할을 맡는다. 아이보다는 어른의 모습이다. 더 감정이입을 하기 쉬운 구조다.



2. 메시지


내 최애 애니메이션인 <월-E>의 세계관은 실은 굉장히 어둡다. 인류는 자원을 모두 소비해 지구를 떠나버리고, 청소 로봇 월-E만이 남아 외롭게 쓰레기를 정리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나, 환경오염, 집단 세뇌 등 무거운 주제가 가득하다. 주로 비주얼이나 캐릭터로 승부를 보는 여타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입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것이 픽사 작품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그런 메시지를 잡아내지 못했다고 해도 여전히 월-E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성인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기에 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특유의 선정성이나 폭력성을 떠올린다. <러브, 데스 + 로봇>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다. (물론 훌륭한 메시지도 담고 있지만) 이런 작품은 혼자 보고 즐길 수는 있을지언정, 아이를 데리고 극장에서 볼 수는 없다. 픽사의 작품은 아동과 성인이라는 두 관객층에 접근함과 동시에, 다시 볼 때마다 다른 감상 포인트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를 유치하거나,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그려낸다. 그렇게 '어른들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된다.





3. 독창성


디즈니의 작품은 대부분 동화를 원작으로 한다. <백설공주>, <라푼젤>, <겨울왕국>까지 이런 경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동화 자체는 분명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대부분 어린 시절에만 경험하는 컨텐츠일 확률이 높다. 독창성을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아이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낸다.


픽사는 이런 디즈니의 행보와는 궤를 달리한다.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의 틀을 새로 짜는 것이다. 쥐가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내는 <라따뚜이>나, 한 아이의 사후세계 모험담을 다룬 <코코>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는 성인 관객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물론 독창적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2011년 개봉한 <카 2>는 평단의 혹평을 받으며 픽사를 침체기로 이끌었다. 그 이후 픽사는 2015년 <인사이드 아웃>을 내놓으며 다시 명성을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나를 포함한 두터운 팬덤을 형성한 것은 덤이다.


픽사의 이러한 독창성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픽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런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가 나온다고 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걱정이 앞섰다. 이 소재를 가지고 더 할 이야기가 있을까? 더구나 이제 장난감은 잊혀 가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최대 완구업체인 토이저러스가 파산 신청을 할 정도로. 하지만 <토이 스토리 4>는 작품성 측면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이런 우려를 단번에 씻어냈다. 보통 같은 소재로 속편을 만들다 보면 전작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무리수를 남발하기 마련인데 픽사는 그 와중에 노련함을 잃지 않는다. 어른인 내가 픽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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