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이상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게 된 3가지 이유
난 어릴 적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만화책에 더 빠져 있었던 터라 아니메 (일본 애니메이션)는 만화책을 영상으로 보고 싶을 때 택하는 대안이었다. 그러다 아니메에 대한 짧고도 강렬한 열정이 불타올랐고 이것저것 작품들을 챙겨봤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점점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끔 생각이 나서 넷플릭스에서 한두 편을 보다가도 더 이상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일까? 그렇다기엔 난 여전히 픽사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이다. 하지만 분명했다. 이제 난 일본 아니메를 보지 않게 되었다. 왜 그럴까? 3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1. 난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 타깃은 10대에서 20대 초반 남성이다. 일본 애니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내러티브는 결국 이들이 가진 환상에서 비롯된다.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하는 예쁘고 귀여운 히로인 (여자 주인공), 일상 속에서 갑자기 펼쳐지는 가슴 뛰는 모험, 나를 믿어주는 친구들까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인 인물들은 대개 동경의 대상이거나 아예 속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그려진다. 특히 이른바 '소년 만화'의 경우 클리셰에 가까운 공식이 플롯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플롯은 대개 '내가 소년이라면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소녀팬들을 타깃으로 한 '순정만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런 특성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이제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이를 먹어가며 이런 환상에 가슴이 두근거릴 시기가 지나갔다. 일본 애니에서 흔하게 나오는 '학원물'은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항상 곁에 붙어있던 친구들은 이제 각자 갈 길을 갔고, 성인 캐릭터는 이제 내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거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점점 그들의 타겟팅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2. 그들만의 리그
어디에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클리셰로 가득하다. 작품성보다는 장르성, 혹은 흥행성을 중시여기는 분야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이러한 반복적인 패턴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나, 한국 드라마, k-pop 등 듣기만 해도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컨텐츠들도 이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유독 일본 애니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헌터x헌터>나 <아키라>처럼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정해진 성공 공식 내에서 제한된 변주를 줄 뿐이다. 한때 나는 이런 공식 속에서 행복했다.
하지만 점점 다양한 컨텐츠에 눈을 뜨게 되면서 어느 작품을 봐도 성에 차지 않았다. 또 그 당시에는 당연시했던 과장된 연출이나, 그림체, 성우들의 대사, 플롯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아니메는 이제 <개그 콘서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때 코미디 장르를 호령했던 <개그 콘서트>는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보는 사람만 보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리면 작품은 딜레마에 빠진다. 새로운 시도를 하자니 기존 팬덤이 반발한다. 그렇다고 성공 공식만 남발하자니 새로운 팬층이 유입되지 않는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들만의 리그라고 보기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아직도 아시아권에 치중되어 있는 k-pop과는 달리, 일본 아니메는 서구권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본 애니의 모순점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쉽사리 난 '애니 오타쿠'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 즉 성공은 거두었을지언정 여전히 대중이 받아들이기 힘든 정서적인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양성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일본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물론 알고 있다. 좋은 작품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마지막 이유가 쐐기를 박았다.
3. 플랫폼의 부재
디즈니는 올해 11월 12일, 자체 컨텐츠 플랫폼인 <디즈니 플러스>를 출시했다. 마블에 픽사, 21세기 폭스까지 인수한 저력을 바탕으로 '디즈니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덕분에 넷플릭스 같은 컨텐츠 플랫폼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플랫폼 시대이다.
잘 생각해보자.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디에서 보는지. 토렌트나,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몇몇은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애니메이션 하면 여기에서 봐야 한다는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처럼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고 불법 다운로드가 당연시되는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정식으로 방영하는 채널이 부재하니 결국 위험부담을 안고 불법 다운로드를 하거나 기존 플랫폼에서 제한된 컨텐츠를 즐길 수밖에 없다.
물론 희망은 있다. 라프텔이라는 스타트업에서 자체 플랫폼을 만들어 애니메이션 시청의 합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들이 넷플릭스, 스팀, 멜론 같은 파급력을 낼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이래저래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오로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이들의 서비스를 구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매력이 없는 컨텐츠인데다 플랫폼을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플랫폼을 옮겨 다니는 피로도도 상당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절대 정답은 아니다. 잊지 말자. 나 역시도 한때 일본 애니에 푹 빠져 살았던 사람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모든 이들이여, 오늘도 즐겁게 덕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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