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괴물' 같은 작품이 나왔다. 바로 드라마 <괴물>이다. 나에겐 인생 드라마다. 국내 드라마에서도 이 정도 수준이 나올 수 있다니. 너무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다. 배우들의 열연, 몰입감 있는 연출, 깔끔한 각본, 반전과 주제 의식까지. 드라마를 비롯한 영상 창작물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고루 가지고 있다.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욱더 몰입해서 봤다.
드라마 <괴물>은 가상의 지역 만양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쇄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다. 20년 전부터 이어진 사건의 고리들이 하나하나 맞춰지며 끝에 다다라 군더더기 없는 결말을 맞는다. 범인은 과연 누구일지, 그 범인의 동기는 무엇인지 등을 추리하는 맛이 있어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중간중간 생각보다 빠른 타이밍에 진실이 하나씩 벗겨지지만 안주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힘있게 이끌어나간다.
스릴러 장르의 특성상 보통 이런 이야기는 범인이 누구인지로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작중에서 주인공들 역시 사건의 뒤를 쫓으며 진짜 범인, '괴물'을 잡아넣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만 드라마 <괴물>을 다 보고 나니 진짜 범인이 과연 특정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특정되어 죗값을 치른다. 하지만 어째서 희생자가 나와야 했으며, 범인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통 스릴러 장르에서 범인의 동기는 개인적이다. 피에 굶주린 사이코패스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복수를 위해서, 아니면 우발적인 충동 때문에 사건을 일으킨다. 드라마 <괴물>에 등장하는 강진묵, 한기환, 이창진 등의 인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괴물>은 이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연결하며 더 큰 그림을 보여준다. 각자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조직적인 은폐가 가해진다. 드라마 <괴물>에서의 진실은 결국, 이 복잡하게 얽힌 욕망의 접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라 이 사건의 진정한 흑막이 모습을 드러낸다.
1. 강진묵 : 자신을 떠난 아내에게서 느낀 열등감과 뒤틀린 복수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성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 된다.
2. 한기환 : 경찰총장직에 대한 욕망에 가족마저 내칠 만큼 매정하다. 음주운전중 뺑소니를 일으키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연줄을 이용한다.
3. 이창진 : 문주시 재개발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욕망이 있다. 그 앞을 막아서는 이들이 있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4. 도해원 : 문주시 시장이 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아들을 끔찍히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직간접적으로 사건을 은폐했으며 오랜기간 협박을 당해왔다.
처음에 드라마 <괴물>이 집어내는 '괴물'은 사람이다. 자신의 딸마저 살해한 강진묵, 모든 일의 흑막인 한기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이창진 등 말이다. 여기에 '괴물이 되기 위해 괴물이 된' 이동식까지. '괴물을 만났다'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괴물>엔 괴물이 넘쳐난다.
그러나 어쩌면 진정한 괴물은 이들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싶다. 문주시와 만양읍을 둘러싼 그 욕망 말이다. 재개발 사업, 시장직, 경찰총장직, 그리고 복수. 이 뒤틀린 욕망의 끈이 얽히고 설키며 각 지점에서 사건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고통에 빠진다. 이렇게 보면 진짜 범인 역시 그 뭉쳐진 욕망의 덩어리가 아니었을까.
드라마 <괴물>의 탁월함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바로 욕망을 사건의 동기로 삼고, 동시에 연이은 은폐공작과 살인의 단초로 활용하는 것이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전혀 어색함 없이 중심을 유지한다. 그리고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는 장면 장면마다 각 인물들이 능동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며 스토리를 보다 더 입체적으로 끌고간다.
처음엔 강민정을 죽인 범인만 밝혀내면 드라마 <괴물>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이들이 저마다의 동기를 가지고 새로운 사건을 일으킨다. 사건은 또다른 사건을 부르고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부디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나는 <괴물>에서 한국 드라마의 희망을 보았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