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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굿 플레이스> - 죽어서야 알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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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의 머피 2020. 6. 1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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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라마 <굿 플레이스>

- 죽어서야 알게 되는 것


<오피스>,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마이클 슈어가 이번에는 사후세계 윤리극(?), <굿 플레이스>를 들고 돌아왔다. 결코 쉽지 않은 주제임에도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배우들의 열연 덕에 내내 웃으면서 봤다.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과 곳곳에 있는 미국식 농담도 일품이다.


드라마 <굿 플레이스>는 죽어서 사후세계에 떨어진 네 명의 주인공을 조명하고 있다. 이들은 결점투성이의 삶을 살았지만 어쩐지 좋은 사람들만 간다는 '굿 플레이스'로 가게 된다. 엘리너는 배려심 없는 이기심 덩어리였고, 치디는 결정장애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렸다. 타하니는 언니에 대한 열등감 탓에 가식적인 선행을 베풀었고, 제이슨은 철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 이게 웬걸, 알고 보니 이곳은 굿 플레이스가 아니라 이들을 고문하기 위한 '배드 플레이스'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주인공들은 배드 플레이스에 와서 좋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죽어서야 알게 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처럼 죽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대신 굿 플레이스로 여행을 떠나보자. 혹시 아는가? 더 나은 사람이 될지.




1.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 엘리너는 자신이 굿 플레이스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윤리학 교수인 치디를 찾아간다. 치디는 그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쳐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더 좋은 사람이란 칸트적 인간에 가깝다. 즉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굿 플레이스에 가거나 마이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인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나 혼자 산에 올라가 고고하게 좋은 사람으로 산다면 굿 플레이스에 갈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굿 플레이스>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다른 이도 좋게 만든다. 엘리너 일행이 진짜 굿 플레이스에 입성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드라마 <굿 플레이스>가 주장하는 좋음(선)과 나쁨(악)의 기준은 뭘까? 이들의 기준은 앞서 언급한 칸트에 가장 가깝다. 칸트는 의무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치디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이 부여한 선한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관점과도 비슷하지만, 어떤 특정한 절대자가 아닌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른다는 차이가 있다. 이를 정언명령이라고 부른다. 타하니가 기부재단을 설립했음에도 배드 플레이스로 온 이유는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점수 시스템도 여기에 근거한다. 즉 절대적으로 정해진 선한 행동을 하면 플러스 점수를, 악한 행동을 하면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판결을 내린다. 다만 <굿 플레이스>가 지적하는 건 선악도 현대의 복잡한 사회에서는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나름 선하게 살려고 유기농 채소를 샀는데, 알고 보니 노동 착취를 하는 악덕 다국적 기업의 제품이라면? 좋은 마음에서 국가에 전 재산을 기부했는데 다른 나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자금으로 쓰인다면? 만약 옛 점수 시스템이 그대로 쓰인다면 인류의 대부분은 배드 플레이스에 떨어져 고문을 받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굿 플레이스>의 점수 시스템은 공리주의에도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 공리주의는 더 나은 결과를 낳는 선택지를 선하다고 본다. 즉 내가 어떤 동기를 가졌는지와 관계없이 얼마나 더 많은 행복, 즉 효용을 만들어내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배드 플레이스로 온 치디를 보라.



3. 파도는 바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는 <굿 플레이스>가 두 윤리적 흐름 사이에서 찾은 타협점이다. 어쩌면 현대인이 현재까지 도달한 영역이기도 하다. 세상은 복잡해지고 선악의 개념은 점점 모호해진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종교, 국가, 교육 등이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런 정해진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답을 찾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결말에서 치디는 말한다. 서양 윤리는 법칙과 규칙을 정하는데 능하지만, 정신적인 탐험을 하고 싶다면 동양으로 가야 한다고. 이러한 플롯은 서양의 기준에서 본 윤리 철학의 흐름을 대변한다. 처음에는 점수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판결이 개인을 좌지우지했다. 그 기준에 따라 누군가는 굿 플레이스(천국)로, 누군가는 배드 플레이스(지옥)로 갔다. 그러다 주인공들이 그 점수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했다. 칸트, 사르트르, 롤스 등 철학자들이 등장해 자신만의 윤리관을 펴기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굿 플레이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보다 본질적인 질문이 고개를 쳐든다. 바로 존재에 대한 고민이다. 무대에 동양 철학이 등장할 시간이다. 치디는 불교의 죽음관을 들려준다. 바다에 파도가 친다. 파도는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나타난다. 그렇다면 파도는 존재하는가? 그 순간에는 그렇다. 하지만 곧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아니, 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파도는 바다가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살다가 언젠가는 죽겠지만 이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나는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순순히 사후세계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비록 우린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파도에 불과하지만, 그 파도가 바위를 깎을 수도, 누군가의 발을 간지럽힐 수도 있다. 즉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한 영향을 주기 위해 착하게 살아야 한다. <굿 플레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왕이면 더 좋은 파도가 되라고. 그게 주인공들이 죽어서야 알게 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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