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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스트레인지 락> - 천상에서 본 지구

컨텐츠/드라마&다큐멘터리

by 법칙의 머피 2019. 10. 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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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스트레인지 락>

- 천상에서 본 지구


<원 스트레인지 락>은 천상에서 본 지구 그 자체를 소재로 삼는다. 이를 위해 우주정거장의 모습을 비추기도 하고, 사막이나 바다, 정글의 가장 깊은 곳을 찍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모여 결국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안식처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된다. 칼 세이건이 말한 '창백한 푸른 점'이 생각났다.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결국은 이 푸른 바윗덩어리에서 사는 것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작품은 일종의 검증된 맛집이다. 어느 작품을 보나 적어도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원 스트레인지 락>에서도 시각적인 연출은 감탄을 자아낸다. 천상과 지상에서 본 지구를 이보다 더 충실히 담아낼 수 있을까? <원 스트레인지 락>은 쉬이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선들을 엮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들의 무대는 말 그대로 전 세계다.


<원 스트레인지 락>은 윌 스미스 (우주에 관한 이야기 중 그보다 어울리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의 내레이션을 필두로 10명의 우주비행사를 인터뷰하며 중간중간 그에 걸맞은 여러 장면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그저 미지의 인물로만 보였던 우주비행사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놓으니 신선했다. 눈을 사로잡는 영상미와 깔끔하게 전개되는 서사 구조까지. 훌륭한 다큐멘터리의 정석이다.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


<원 스트레인지 락>을 보다보니 엉뚱하게도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그에게는 예술가 친구가 한 명 있는데 하루는 그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은 예술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아름다움을 캐낼 수 있지만, 과학자인 파인만은 이성적인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희석해 버린다고.


파인만은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은 원자들의 움직임이나, 세포의 정교함, 우주의 신비를 캘 수 있기에 도리어 거기서 다른 아름다움을 맛본다고. 누군가는 잘 정리된 수식에서, 누군가는 가슴을 뒤흔드는 선율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도리어 뭔가를 잘 알아갈수록 더 그 대상에 대해 깊이 조응할 수 있다.


천상에서 본 지구는 알면 알수록 당연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유일한 행성. 자극(磁極)에서 발생한 자기장이 유해한 자외선을 막아주고, 심해의 열수구에서 나오는 유기물이 생명을 탄생시켰고, 사막의 모래바람이 아마존에 닿아 산소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절대 당연하지 않은, 차라리 특이한 현상이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도 <원 스트레인지 락>이다.


당연함에서 벗어나려면 그 대상과의 거리를 둬야 한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의 소중함을 깨닫고, 독립하면 가족이 그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 스트레인지 락>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지구라는 행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천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천상의 시선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너와 나를 나누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원 스트레인지 락>을 보다 보면 그 기준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알게 된다. 우주정거장에서 내려다보면 어차피 같은 푸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것을. 뭐 이리도 서로가 밉다고 다투고 있는지.


물론 알고 있다. 지상에 내려와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다시 싸우게 되리라는 점을. <원 스트레인지 락>이 제공하는 천상의 시선을 지속해서 내면화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우리는 결국 하나라는 걸 되뇐들,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니까.


하지만 피부색으로, 종교로, 직업으로, 학교로, 지역으로, 재산으로, 성별로, 나이로 너와 나를 구분 짓기 이전에, 결국 같은 이상한 바윗 덩어리, 원 스트레인지 락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누군가라는 점을 한 번쯤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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