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 스튜디오가 성공한 3가지 이유
미국에 픽사가 있다면 일본에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지브리의 작품은 항상 나를 사로잡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브리는 전 세계에 일본 아니메(Anime, 일본 애니메이션) 내지는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로라는 거장을 필두로 굵직한 작품을 내놓으며 현재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지브리의 작품들엔 어떤 특별함이 있길래? 지브리가 성공한 3가지 이유를 알아보자.
1. 아니메를 알리다. 하지만 다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하 아니메)은 서브 컬쳐의 대표주자이다. 좋게 말하면 그들만의 독특한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대중에게 어필하기는 힘든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좀 사그라든 감이 있지만, 이른바 오타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장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아니메는 유독 힘을 쓰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에 2017년 개봉한 <너의 이름은>을 둘러싼 논란은 아니메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너의 이름은>은 (지브리를 제외한)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 중 이례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자연스레 기존의 소수 매니아 관객층을 넘어 일반 대중 관객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몇몇 관객이 영화의 OST를 큰 소리로 따라부르거나 대사를 외치는 등 크고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당연시 여겨지는 문화였지만 일반 관객 사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뜬금없는 나레이션이나, 여성 주인공에 대한 성차별 논란도 일어났다. 사실 아니메에서는 꽤 흔하게 반복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 주류 문화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재밌게 봤지만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았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이런 서브 컬쳐의 움직임과는 궤를 달리한다. 비일상적으로 과장된 대사와 유독 큰 눈,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성적인 묘사나, 클리셰에 가까운 플롯 없이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브리 작품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일상적인 톤을 유지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일부러 전문 성우보다는 그 캐릭터에 맞는 사람들에게 더빙을 맡겼다고 한다. 여기에 서정적이며 둥글둥글한 스케치 선이나, 지브리만의 독창적인 세계관과 플롯, 아름다운 피아노 음악이 더 해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세월을 타지 않는 명작들을 성공시켰다.
지브리는 아니메를 전 세계에 알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류 아니메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양산형 작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한장 한장 손으로, 붓으로 작품을 그려냈다. 관객들은 이런 지브리만의 독특한 색깔과 정신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2. 대비와 공존의 미학
지브리의 작품에는 대비가 심심찮게 보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자연과 기계문명을, <반딧불의 무덤>에서는 어른들의 전쟁과 이에 파괴되어 가는 아이들의 삶을 대비시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 자신의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전달한다. '반전(反戰)과 자연보호,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다만 지브리의 탁월함은 이런 와중에 공존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는 데 있다. 공존은 서로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대비된 두 집단을 바라보면 쉽사리 선악을 나눌 수 없다. 국내에서는 <원령공주>로 번역된 <모노노케 히메>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언뜻 원령공주로 대변되는 자연은 선, 영주를 중심으로 한 인간은 악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인간들 역시 자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절대적 중립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다른 집단을 악마로만 그려내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에게 저주를 건 마녀는 자신이 되려 저주에 걸려 주인공 일행과 친구가 된다. <모노노케 히메>에서의 영주는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을 건설하러 떠난다. 악역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권선징악식 플롯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지브리는 따뜻한 시선으로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3. 일상과 환상을 오가다
지브리의 작품 <귀를 기울이면>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 영화를 보던 아이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 것이다. 자기 집 앞이 그대로 스크린 속에 들어 있노라고.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언뜻 환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공간을 배경으로 작품을 그려낸다. 대만의 지우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를 배경으로 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지브리는 일상의 공간에 환상의 이야기를 부여한다.
사실 지브리 작품들에 등장하는 공간은 굉장히 일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웃집 토토로>는 이름 없는 한 시골 마을이, <벼랑위의 포뇨>는 조그마한 어촌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일본 동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귀를 기울이면>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 공간뿐이랴.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어디에서나 마주칠법한, 그런 살아있는 사람들. 지브리의 영화 안에서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은 도리어 조력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치히로와 하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인공 소피와 하울을 보라. 이들은 평범할지언정 환상의 세계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그렇게 이질감 없이 관객을 설득했다.
지금까지 지브리 스튜디오가 성공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에 대해 알아보았다. 결국 '지브리만의 색깔'을 뚝심 있게 내보인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요즘 얼마나 될까 싶다. 그래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해체가 더욱더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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